무거운 가방을 이끌고 집으로 가자.
낑낑거리며 계단을 내려가자.
토요일 저녁의 피카딜리 서커스역에서 탄 피카딜리 라인에는 빈자리가 없었지.
좁은 튜브 안에서 짐을 꼭 붙잡고 두리번거리다가 맨 끝자리에 겨우 앉았어.
내 앞에는 피로한 얼굴로 함께 두리번 거리던 흑인 남자가 있었는데 뭐랄까 얼굴의 세로 길이가 짧은 저 남쪽의 누군가가 생각나는 얼굴이었어.
왼쪽편에서는 아기들이 울고 있었지.
한쪽에서는 흑언니들이 아기를 달래고
그 맞은 편에서는 백형이 아기를 안고 있었어.
내 맞은 편에는 다운증후군의 여성이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과 함께 앉아있었고.
어머니는 뭐랄까 11시 5분. 같은 인상이었어.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나는 주제넘게도 아무리 영국이어도 장애인 딸을 키우는 인생은 쉽지 않겠구나.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나와 함께 두리번 거리던 흑인은 어느새 맞은 편 딸의 옆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더라고.
지하철은 종점인 공항을 향해가고 드문드문 빈자리도 보였어.
어느샌가 내 옆 쪽에 발랄한 목소리의 여성이 건너의 어머니에게 묻는거야.
'저기 보니 오늘 내일 피카딜리 라인 중에 운행을 안한다는 곳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어머니는 친절하게 맞다고 확인을 해주었어. 다음역에서 내려 다른 기차로 갈아타라고 하였지.
여성은 밝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어.
다음역에 정차할 때 쯤 어머니는 뒤를 돌아보더니 다른 플랫폼으로 건너가지 말고 바로 뒤 쪽에서 갈아타면 된다고 웃으며 알려주었지.
사람은 인상만으로 판단하면 안되는 거였지. 난 이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사람 보는 눈이 없다니까.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딸로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인상을 쓰면서 '나 속이 안 좋아.'하더라고.
순간적으로 난 조졌네.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어. 토하면 냄새 많이 날텐데.
어머니는 다른 생각을 좀 해봐. 라고 하였는데
딸은 '노력하고 있어!'라며 약간 짜증을 내었지.
어머니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비닐봉지를 꺼내며 힘들면 다음역에서 내리자.라고 하였는데 1분에 하나씩 나오던 다음 역이 나오질 않는거야.
난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사람의 노랫소리가 들렸어.
앞을 봤더니 속이 안 좋다던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거야.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군. 하고 보고 있는데
옆에서 책을 읽던 남자가 책을 덮고 나지막히 노래를 따라하더라고.
어머니도 합세하였지.
셋은 노래 한 곡을 다 불렀어.
노래가 끝나고 이제는 속이 괜찮아졌는지 고마웠다고 많이 도움이 되었다고 인사를 하더라고.
어머니도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며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하냐고 물어보았지.
남자는 당연하죠.라고 남아프리카의 악센트가 있는 영어로 대답했고 이어서 어머니는 그가 읽던 책을 보더니 무슨 책을 읽느냐고 하더라고.
아메리칸 인디언에 관한 책이라고 하면서 셋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지. 어머니는 책 표지를 보더니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지만 내 형제가 매우 좋아하는 책이어서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래도 요즘 pc 관점에는 좀 그렇다. 좀 그렇지만 그래도 좋은 책이라 는 요지의 대화를 하는 것 같더라고.
그리고 두 여성은 만나서 반가웠다는 인사를 남기고 다음 역에서 내렸어.
나는 건너의 남자가 책 읽는 모습을 한참 바라봤어.
그런 저녁이 있었어.
여러 여행을 하였지만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좋은 마무리였다고 생각해.
아마 당분간은 그 장면들을 잊기 힘들 거 같아. (라고 쓰고 또 금방 잊겠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공항으로 가던 그 길을 기억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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